아이들이 묻고 노벨상 수상자들이 답한다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사실 심심할 틈이 없었습니다.
반대로 나이가 들어 호기심이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심심해 한다는 것입이죠. 그래서 겉으로 들어나는 대표적인 증상중 하나는
"뭐 재미있는 거 없어요?"
라는 영양가 없는 질문을 남발하고 다닌다는 것이죠. 누군가 재미있는 것을 이야기 해줘도 어차피 따라서 할 의지도 없으면서 말이죠.
이런 영양가 없는 질문이 아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질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것을 좀 더 잘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같은 것도 있겠죠. 이것에는 뭐든지 바꾸어 넣을 수 있습니다. 모든 긍적정인 변화는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 아이들이 묻고 노벨상 수상자들이 답한다 - ![]() 베티나 슈티켈 엮음, 나누리 옮김/달리(이레) |
"아빠는 왜 살아?"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되물었다.
"너는 아빠가 왜 산다고 생각하는데?"
다섯 살배가 아들 녀석은 이마를 찡그린 채 눈을 감고 잠시 요모조모 궁리하는 눈치더니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아침에 나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저녁에 나한테 동화책 읽어 주고, 목욕물 받아 주고, 나랑 놀아 주려고..."
이 얼마나 경이롭고 속속들이 의미심장한 인생인가! 나는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내게 저 꼬마 루이스가 없다면, 내가 저 애를 유치원에 데려다 줄 수 없다면, 저녁에 동화책을 읽어주지 못한다면, 목욕물을 받아 줄 수 없다면, 저 애와 함께 놀지 못한다면... 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 그렇다면 넌 왜 사니?"
나는 아들에게 물었다.
"놀려고."
아들 녀석이 말했다.
"그래? 그럼 우리 놀자!"
우리는 놀았다. 말타기 놀이를 했거나 복도에서 축구를 했거나 아니면 그저 카드 놀이를 했을 것이다. 기억이 잘 안난다. 이제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첫째, 아이들은 난데없이 매우 심오한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어느 어른이 "너는 왜 사니?"같은 질문을, 아니 정확히 그 질문을 다른 오른에게 하겠는가?
둘째, 우리는 그 심오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왜 사는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아침 식사 후 커피를 마실지 홍차를 마실지도 모를 때가 많은데.
마지막으로 나는 비록 대답은 못 해 주었지만 그 대신 아이와 놀아 주었다는 것이다. 루이스가 내게 이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이와 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질문은 무엇인가를 움직이게 한다. 그것은 삶의 원동력이다. 그거 질문을 하고 답을 찾기 시작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상상력에는 날개가 달린다. 어쩌면 아이와 내가 함께 놀았다는 사실이 그 질문에 대한 옳은 답이었는지도 모른다.
-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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